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공화국 (문단 편집) === 베트남 제1공화국 ===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베트남국을 폐지하고 [[보대제]]를 폐위,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응오딘지엠은 정치적 선전방송을 통해 보대제를 쾌락 추구자로 비난하고 자신은 국가를 위한 경이로운 일꾼으로 선전했다. 응오딘지엠을 행운의 상징으로, 보대제를 불행의 상징으로 띄운 선거 전략은 주효하여 보대제는 98.2%의 찬성 투표를 통해 폐위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미국 중앙 정보국|CIA]]가 배후에서 깊이 관여한 부정선거였다. 98.2%라는 결과도, 99%로 발표하려던 것을 [[미국]]에서 너무 비민주주의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해서 낮춰서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있었으니, 공화국을 건국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트남국의 무지막지한 부패를 베트남 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고 만다. 또한 북베트남에서 파견한 간첩과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베트민에 가담한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커졌다. 간첩이 정부와 국회 등 국가 지도부 전체에 쫙 깔리니 국가 기밀이 북베트남에 유출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초기에는 응오딘지엠의 불교도 군벌 숙청과 치안력 회복, 그리고 무리한 토지개혁과 대규모 농민봉기로 어수선하던 북베트남 내부 사정[*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지원해 준 중국측 고문단의 요구로 [[대약진 운동]]을 모델로 공산주의화 정책을 실시했는데 원본부터 그 꼬라지라(...)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호찌민 본인도 [[자아비판]]을 해야했을 정도.] 덕분에 6년 정도 평화를 누렸던 베트남 공화국이었지만, 가혹한 탄압으로 내부를 어느정도 정리하는데 성공한 북베트남이 국가정책으로 남베트남의 전복을 채택하고 남베트남의 친베트민 게릴라 세력인 [[베트콩]]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은 악명 높은 베트콩의 준동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응오딘지엠]] 집권 시기만 하더라도 풍부한 쌀 수확이 담보되는 기름진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의 가파른 성장, 외자 적극 유치 정책을 통한 유리공업/고무공업 등의 경공업의 대단위 육성, 질 좋은 수산물의 해외수출을 장려하는 국가 정책 덕분에 북베트남보다 경제력이 앞섰지만[* 물론 그렇게까지 잘 살지는 못하였다.] 미국의 원조를 받아 양성한 군인들이 훌륭한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무능하고 의지가 없으며 정치 개입과 쿠데타를 일삼아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초대 총통이던 응오딘지엠이 초기에는 친불 군부 숙청, 공화국 체제 수립, 매춘 타도, 부정부패 타도[* 공무원 부패 문제 해결을 위해 뇌물 없이도 부유히 살 수 있게끔 월급을 올리고, 부패한 공무원은 엄하게 처벌하는 당근과 채찍을 썼다.], 정치깡패 토벌을 통한 치안 안정[* 훗날 베트콩이 설치면서 흔히들 치안이 굉장히 안 좋은 나라 정도로 인식하지만 디엠 집권 시기 한정으로 치안은 상당히 괜찮았다. 수도 사이공에서는 담이 낮아도 도둑 들 걱정이 없을 정도로. 위의 공무원 부패 문제 각주와 함께 출처는 '나라를 빼앗긴 군대의 비망록-월남군,그들의 이야기' ] 북베트남의 무리한 토지 개혁과 종교 탄압 때문에 발생한 80만에 달하는 탈북민을 정착시키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경공업과 농업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외자유치를 포함한 각종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는 등 그럭저럭 잘 출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에 맞서기 위해 응오딘지엠이 내세운 것이 천주교도, 남베트남에선 소수인 북부 통킹인, 중부 안남인 중심 내각[* 응오딘지엠 본인도 북베트남령인 안남 지방 꽝빈 성 출생이었다.], 친족들로 정부를 채우는 족벌정치였고 미국의 입김을 줄이겠다는 이유로 조성된 가족정치 덕분에 공직을 맡을 사람을 뽑는 기준이 '친인척인가' 혹은 '[[가톨릭]]을 믿는가'였으니 말 다했다.[* 당시 남베트남의 종교 비중은 '''[[불교]] 신자가 90% 이상'''이었다. 이 당시 베트남의 가톨릭 신자는 북베트남령이던 중북부 지방이 더 많았다.] 또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 성격을 강화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nhu_1882962f.jpg]]|| ||<:> [[쩐레쑤언]][br](Trần Lệ Xuân, 陳麗春, 1924~2011)|| 1963년 5월에 접어들어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분개한 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인 [[틱광둑]](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이 [[소신공양]]으로 세계에 베트남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으나 응오딘지엠 일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Ngô Đình Nhu, 吳廷瑈)의 아내이자 역시 부패의 핵심 축 중 하나였던 [[쩐레쑤언]]은 마담 뉴(Madame Nhu)라는 별명으로 독신이었던 [[응오딘지엠]]의 사정으로 인해 남베트남의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는데 그녀는 소신공양에 대해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_PWM9gWR5E|당시 영상]] >그에 비하면 불교 지도자 놈들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중놈 하나 '''[[바베큐]]'''로 만든 것뿐인데 말 입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역대급 [[고인드립]]에 그동안 쌓인 대중의 분노가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했다. 심지어 당시 미국 정부도 어이를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楊文明)[* 후일 사이공 함락 당시의 마지막 총통이었다. 위의 사건 이후 불과 11년 반 후의 일.] 장군을 위시한 고위 군사 사령관들이 작당하였다. 그 해 11월 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인혁명회의를 설립한다.[* 베트남 제2공화국 시절에는 이 쿠데타를 63.11.1 혁명(Cách mạng 1-11-63)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응오딘지엠과 동생 응오딘뉴는 도망쳐서 교회에 숨어있다가 다음 날 발견되어 사살당했다.[[https://en.wikipedia.org/wiki/Ngo_Dinh_Diem#/media/File:Corpse_of_Ng%C3%B4_%C4%90%C3%ACnh_Di%E1%BB%87m_in_the_1963_coup.jpg|(클릭 주의) 사살당한 응오 딘 지엠 시신]] 이 쿠데타는 사실 [[미국 중앙 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총 42,000달러나 되는 뇌물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저런 망언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조차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CIA가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독단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해도 묵인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쿠데타 지원 자체를 행정부 차원에서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외로 달아난 쩐레쑤언은 베트남 정부를 비난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과거 냉전 시절에 반공 투사인 양 행세하기도 했으나 미국에선 용녀(Dragon Lady. 동양의 용과 달리 서양의 드래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같은 악랄한 여자라는 비아냥만 쏟아졌으며,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거지 꼴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죽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타도하고 세워진 새 군사정부를 승인한다. 그러나 비록 독재자일지언정 국가 건설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룰 정도의 지도력이 있는 지도자는 당시 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을 제외한다면 찾기 너무나 힘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